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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헌 김대흥(瀛軒 金大興)

 

김대흥(金大興)은 입도조 좌정승공의 19세손으로 1887년 제주시 봉개동에서 태어났다.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수헌 윤용구, 위창 오세창, 석정 안정원선생 등과의 교분을 통하여 학문을 쌓아 나갔다.

40세 때 향리에 동보서당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시가에도 능통하였고 특히 종사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 김해김씨 좌정승공파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1921년 임술석장대동보에 수단을 내어 최초로 전국의 대동보에 일족이 등재되었고 이대 비로서 입도조 만희 후손들이 좌정승공파로 불리게 되었다.

1921년 임술석장대동보에 수단을 내어 최초로 전국의 대동보에 일족이 등재되었고 이때 비로소 입도조가 지은 은감유성록, 맥서여감, 양해원사록과 시가 29편을 발굴 정리하였으며, 그 후 전국 유명 서원인 두문동 서원, 남고서원, 모성공회 및 유림들에게 입도조의 행장을 담은 통문을 보냈다. 그 결고 경학원 대제학 곡부 공성학으로부터 좌정승공 만희전, 남포 백날철의 정절사 창건기, 남고서원 등에서 답통문을 보내와 입도조의 충(忠), ‧ 효(孝) ‧ 인(仁), 의(義) ‧ 절조(節操)의 생애를 전국에 입증하게 되었다.

그후 아들 규형이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입도조 유고 및 통문, 답통문을 정리 보존하였으며, 좌정승공파 종친회를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도종친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종친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다음은 영헌(瀛軒) 김대흥(金大興)이 입도조의 높은 정절을 그리어 쓴 시다.

 

松山喬木慕斯賢(송산교목모사현) 송악산의 교목처럼 玄人을 사모함이 이와 같은데

晦跡韜名旣歷年(회적도명기역년) 자취를 없애고 이름을 감추은지 이미 오랜 세월 지났네

靖節心常元亮晋(정절심상원양진) 靖節의 마음 떳떳함은 晋의 元亮¹과 같고

悲歌氣壯召南燕(비가기장소남연) 悲歌의 심기 장함은 연의 소공²이 남쪽을 다스린 것 같네

耿光窮宙星何沒(경광궁주성하몰) 밝은 빛이 세상에 다 되어도 별은 어찌하여 없어지겠는가

勳業陵煙人莫傳(훈업능연인막전) 勳業은 구름을 뚫고 높이 솟아서 사람들이 전하지 못하네

崇禮苾芬宜可薦(숭례필분의가천) 예를 높이고 향기롭게 받들도록 마땅히 천리하여야 하는데

孰能左右共周旋(숙능좌우공주선) 누가 능히 좌우에서 함께 주선하리요

 

1) 晋의 陶潛 字는 淵明 또는 深明, 晋나라가 망하여도 晋을 섬기어 다른 나라에 벼슬을 하지 않았다. 陶潛 明의 歸去來辭는 유명하다.

2) 試經 國風의 篇에 召公이 南方을 다스리니 聖人의 敎化를 입었다하여 召南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