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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투사 김운배(金沄培)

 

김운배(金沄培)는 입도조 좌정승공의 20세손이다. 군수 김희주(金熙冑)의 조카로 생부(生父)는 희수(熙穗)인데 숙부 희경(熙慶)이 후가 없으므로 그 뒤를 이었다. 광무 3년(1899년)에 조천에서 태어나서 호는 해강(海崗)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호학(好學)하여 진취적인 성품이었으므로 모든 이의 기대를 모았다.

 

21세때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22세 되는 1920년 2월에 동지 문봉기(文奉祺)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서 그 막하(幕下)에서 활동하다가 동년 11월에 임시정부 요인 김창숙(金昌淑)의 지시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기금을 모금하는 사명을 받았다. 김운배는 먼저 상해를 출발하는 일본 상선으로 일본 신호(神戶)에 도착, 대판을 경유하여 동년 12월에 부산에 잠입하여 밀양 서울등지에 임시정부 요인의 편지를 13통을 전달하며 모금운동을 하던 중, 문봉기는 다른 선박으로 박은식(朴殷植)이 지은 ⌜조선독립혈사⌟60부를 가지고 부산에 도착하였다가 검거 되어 김운배, 문봉기는 모두 1921년 6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이 언도되어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감형되지 않아서 그대로 복역하였다.

 

김운배는 출옥 후에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의 소임을 맡고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길림(吉林), 장춘(長春) 방면을 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며 ⌜대동민보(大東民報)⌟, ⌜전우(戰友)⌟등의 편집인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8월 사평가(四平街)에서 일본 관헌에 검거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실을 완강히 부인한 까닭에 심한 옥고를 치렀는데 병으로 방면되어 귀향하였다. 집안에서는 재산을 정리하여 구환(救患)하기에 전력하였으나 1934년 9월에 36세를 일기로 종명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애국장(愛國章)을 추서하였다. 묘비에는 안요검(安堯儉)의 글로 구구절절 그의 애국운동의 행적이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