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제목 없음

 

 

의녀반수(醫女班首) 김만덕(金萬德)

 

만덕은 영조 15년(1939년) 아버지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高氏) 사이에서 제주성내에서 태어났다 선비집안으로 증조부는 성순(性淳), 조부는 영세(永世)로서 만덕은 입도조 좌정승공 만희의 15세 손녀이다.

영조 26년(1750년) 만덕이 12세 때 제주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봄에는 천연두, 여름에는 호열자가 휩쓸고 간 제주도의 상황은 처참한 것이었다.

이때 만덕이 집에도 불행이 닥쳐와 정월에는 아버지, 6월에는 어머니가 호열자로 사망하였다. 오빠 만석(萬碩), 만재(萬才)와 함께 졸지에 고아가 된 만덕은 동네 여인이 주선으로 기방(妓坊)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만덕은 영리하고 부지런하였으며 타고난 미모의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였다. 만덕이 18세 되던 해에 수양어머니가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여 기적(妓籍)에 올림으로써 만덕은 본의 아니게 기역(妓役)에 종사하게 되었다.

 

만덕은 기역(妓役)에 종사한지 5년만에 명기로서 이름을 날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생활에는 여유가 생겼지만 항시 마음속에는 번민이 있었다. 그는 기녀로서 이름이 알려질수록 선비 집안이 천민대접을 받는다는 원망의 소리였다. 만덕은 조상에 대해서 면목이 없고, 자기로 인하여 동기간이 천민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견딜수 없는 고통이었다. 23세 되는 해에 만덕은 목사 신광익(申光翼)과 판관 한유추(韓有樞)에게 눈물로 진정하였다.

“ 소녀는 본시 양가의 출신이온데 지난 경오년에 부모님이 염병으로 돌아가신 후 의지 할 곳이 없어 부득이 기녀의 집에 의탁하게 되었는데 소녀를 수양딸로 삼음으로 인하여 나의 뜻에 관계없이 기안(妓案)에 등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양가(良家)의 딸이 기생이 될 수도 없거니와 조상님에 대해서도 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사또께서 이를 불쌍히 헤아려주셔서 기안(妓案)에서 제명하여 양녀(良女)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소녀는 친가로 돌아가서 친가를 재건하는데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힘이 있다면 저와 같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습니다. 옛 사람도 ‘자기 몸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조상의 근본을 욕되게 하는 것을 아프게 뉘우칠 줄 모르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또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로 소녀의 소청을 허락하여 주시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아니하고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명기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만덕이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하는 가냘픈 모습에 목사와 판관은 측은한 생각에 기안(妓案)에서 제명하여 줄 것을 합의하고 말하기를 “기안(妓案)에서 제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나 집안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인륜을 밝히는 일에 해당되므로, 만일 이를 거절할 경우 인륜을 바로 잡을 수가 없어 이를 허락하는 것이니 모쪼록 착한 마음으로 양가(良家)의 체통을 지키라”고 하였다.

 

 

▲ 만덕묘비

 

12년 만에 양녀(良女)로 집에 돌아온 만덕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간의 돈으로 객주집을 차렸다. 객주집은 상인들의 물건매매를 소개하고,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만덕의 객주집은 박리다매(薄利多賣), 신용본위(信用本位)의 경영 방식으로 날로 번창하였고, 제주토산물과 육지 상품들을 교환하는 무역거래를 하여 거상(巨商)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만덕은 사업에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화려한  옷을 입지 않으며 소식(疏食)으로 보리밥, 조밥을 먹으며 주택은 꾸미지 아니하고 근검 절약으로 일관하였다.

 

정조 16년(1792년)부터 19년(1795년)까지 4년 동안 제주는 계속하여 흉년이었다. 특히 정조 18년 갑인년 흉년은 전례가 없는 대흉년이었다. 당시 심낙수(沈樂洙) 목사는 아뢰기를 “갑인년 8월 27일 태풍으로 온 섬은 비로 쓸어버린 것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많은 구호곡을 수송하여 도움을 주는 가운데 구호곡을 실은 수송선이 침몰하여 기민구호에 많은 차질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소식에 제주백성들은  낙망과 충격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암담한 마음으로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만덕은 흉년에 굶주려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오늘날까지 자신을 도와준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분들의 은혜에 보답할 때는 바로 이때다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쌀 살 돈 1천금과 배삯까지 주어 육지 연해 고을에서 곡물을 사들여 만선으로 10여일만에 돌아왔다. 10분의 1은 내외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과 일보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나머지 4백 5십석은 관가로 보내어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제주목사 이우현(李禹鉉)은 김만덕의 구호곡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진휼의 노고를 치하하고 “김만덕을 불러서 그 소원을 물어 보고 난이(難易)를 논하지 말고 특별히 시행하라”고 분부하였다. 새로 부임한 유사모(柳師模) 목사는 만덕을 불러서 임금님의 유지(諭旨)를 전하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만덕은 임금님의 은혜에 감읍(感泣)하면서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서울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당시 제주 백성은 육지에 나가는 것이 통제되어 있었고, 특히 여자는 출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대로 아뢰었다. 장계를 받아 본 임금은 쾌히 허락하고 역마(驛馬)를 하사하여 연로(沿路)의 관(官)에서는 숙식(宿食)과 편의를 제공하라고 분부하였다.

 

 

▲ 모충사내 만덕관

 

정조 20년(1796년) 9월 하순에 서울에 도착한 만덕은 좌의공 채제공(蔡濟恭)을 찾아 뵙고 상경의 뜻을 고하니 채제공은 먼 길을 오게된 것을 위로하고,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선혜청(宣惠廳)에 명하여 만덕의 체류하는 동안 숙식을 돌보게 하고 특별히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의 벼슬을 내렸다. 만덕은 궁궐에서 예법을 익힌 뒤 궁궐의 법도에 따라 임금을 알현하였다. 임금은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심을 발휘하여 천백여명의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리었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로다”하시고 상으로 중국산 비단 다섯필을 내렸다.

그리고 금강산 구경은 겨울이 문턱에 닥쳐오고 있으므로 겨울은 서울에서 보내고, 내년 새봄에 구경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3월에 강원 감영의 주선으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입궐하여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니 그의 부친 응열(應悅)에게는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증자(贈資)하고 그 오빠 만석(萬碩)에게는 구호미를 수송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내리었다. 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니 채제공은 “너는 남자들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여자의 몸으로 구경하였으니 그 얼마나 장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냐”하고 만덕의 모든 행적을 적어서 [만덕전]이라 이름 짓고 웃으면서 건네주었다.

장안은 만덕의 이야기로 꽃이 피었고,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한번 만덕을 만나보기를 원하며 시(時)를 지어 만덕에게 보내었다.

 

 

▲ 은광연세(추사 김정희 편액을 석각)

 

제주에 돌아오나 도민은 칭찬이 자자하였으나 장사를 계속하며 검소한 생활로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고,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쌀을 주어 자선사업에 주력하였으므로 온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만덕 할머니’로 통칭되었다.

 

 

▲ 만덕묘

 

만덕은 순조 12년(1812년) 10월 22일 74세로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내가 죽거든 성 안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으며 동문 밖 並園旨(고으니모르)에 온 도민의 애도 속에 서향 묘로 안장되었다.

그 후 현종 6년(1840년) 대정에 유배 온 추가 김정희 (秋史 金正喜)는 만덕의 행적을 듣고 감동하여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번진다’라는 뜻으로 은광연세(恩光衍世)라 크게 쓰고 그 옆으로 “김종주(金種周)의 할머니가 이 섬에 큰 흉년을 구제하니 임금께 특별하신은혜를 입어 금강산을 구경하였으며 공경대부들은 모두 전기와 시가로 이를 노래하였다.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므로 이 편액을 써 보내어 그 집안을 표하는 바이다.”고 하였다. 김종주는 김만석의 손자로 그를 양손으로 삼았다.

1977년 1월 3일 모충사로 이장하였으며 제주도 에서는 ‘만덕상’을 제정, 근검절약으로 역경을 이겨내어 사회를 위하여 공헌한 여인을 선정하여 1980년부터 매년 한라문화제 때 시상하여 만덕 할머니의 박애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