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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기량

 

김기량(1816~1866)은 1816년 제주목 좌면 함덕리(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5현제의 맏이인 그는 3명의 아들을 두었고, 배에 약재나 그릇 등을 싣고 제주와 육지를 왕래하며 무역하는 상인(商人)이었다.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세보)

 

ㅇ 증언자 : 김기량의 제 성민의 손 在玉 및 현손 性秋, 行淡

 

족보에 보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과(司果:군사제도 五衛의 정6품)를 역임하였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고 본다. 부친 광록과 아들인 일관의 묘가 각각 조천읍 와산리와 선흘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반해 김기량의 기일과 묘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대신 出陸末還(육지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음) 이라고 기록되어 김기량이 무역을 하러 나갔다가 통영(統營)에서 순교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함덕의 김씨 집안에서는 김기량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선달(先達)할아버지는 자주 육지를 왕래 하였던 분”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무역업에 종사하던 김기량은 1857년 1월 24일, 문영환(文英煥), 박윤근(朴潤根), 한행문(韓行文), 문광철(文光哲) 등 4명과 함께 무역차 서귀포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그는 표류한 지 1개월 5~6일 만인 3월 1일 중국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으며, 3월 5일에는 홍콩에 도착하였다.

김기량은 그 곳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되고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레명으로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였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1857년 5월 25일 홍콩을 출발하여 1858년 1월 12일 이주에 도착함으로써 거의 1년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제주에는 4월 3일 조천포(朝天浦)를 통하여 귀환하였다.

제주에 도착한 김기량은 가족을 입교시키고 제주지역에 천주교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샤머니즘과 새로운 종료에 대한 배척등으로 선교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됨으로서 중단 될 수 밖에 없었다.

제주에서의 선교를 그만두고 무역을 하며 통영에 가서 박하유를 거래하다 “박하유는 천주항쟁 이의 물건이다”라고 지목되어 9월에 통영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3개월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대구 감영에서 장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병선마당에서 곤장 60대를 쳤으나 죽지 않자 옥으로 옮겨 목졸라 죽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로 순교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김기량은 특별히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천주교 제주교구에는 선교 100주년을 맞아 자랑스런 우리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김기량(김성철)선조를 발굴하여 시복, 시성을 위하여 온 힘을 기우리고 있다. 순교자 김기량 선조의 기념비는 제주시 황사평 천주교 성지와 함덕 중학교 서쪽편에 세워져 있어 많은 천주교인들의 순례를 하여 그 분의 뜻을 기리고 있어 우리 후손들도 종교를 떠나 한 번쯤은 참배하면 좋을 듯 싶다.

(본문은 천주교 제주교구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제주 순교자 김기량을 요약한 것임.)

 

▲ 제주순교자 묘역에 있는 김기량 순교 기념비(황사평 소재)

 

▲ 김기량 순교 기념비(황사평 소재)

 

▲ 김기량 순교 현양비(함덕 소재)